1945년 11월 5일 중국 상하이 공항에 모여있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
오른편에 홀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자 쓴 노인이 다섯째 이시영 선생님입니다.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1940)
중국의 상해에서 88세의 노령에도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둘째 이석영(李石榮, 1855~1934)
가장 많은 독립자금을 보냈지만, 상하이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아사하셨습니다.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병사했습니다.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자식들을 양육할 수 없어 보육원에 맡기고,본인은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때울 만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운동을 하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의해
중국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다섯째 이시영(李始榮, 1869~1953)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직을 맡았으며 조국에 돌아와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어
신흥대학을 설립했고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하셨습니다.
여섯째 이호영(李頀榮, 1875~1933)
밀정을 처단하는 다물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1933년 베이징에서 가족들과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여섯 형제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나라를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대한민국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모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몇 대에 걸쳐 풍족하게 쓸 명동 일대의 토지, 현재 시가 600억 원
이회영의 집안은 선조인 이항복 때부터 시작해 8대에 걸쳐 판서(조선시대 6조의 으뜸 벼슬)를 배출한 조선의 명문가였습니다. 또한 서울 명동 일대의 땅이 거의 이 집 소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갑부였습니다. 가진 재산과 조상 대대로 쌓은 명망으로 그들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경술국치가 있었던 1910년, 조선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은사금을 주면서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선전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일제가 준 귀족 작위와 돈에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조국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그들의 재산을 몽땅 내놓고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망명의 삶을 택했습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들은 한 달 동안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집과 논밭을 팔아 40여만 원을 마련했습니다. 소값으로 환산하면 오늘날 600억 원, 땅값으로 치면 2조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흔히 사회적 지위에 맞게 솔섬수범하는 자세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하는데, 이회영의 가문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회적 지위에 맞게 솔섬수범하는 자세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하는데, 이회영의 가문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생동안 독립운동을 후원하며 전 재산을 바친 그의 삶은 가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난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김규식, 신채호,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등 끊임없이 독립운동자금을 댔고 가져간 자금이 바닥나 중국의 빈민가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훗날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은 "일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여섯 형제, 재산과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단 한 명만 살아남아이회영의 형제는 모두 여섯이었습니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자제였던 이들 6형제는 일제 때 나라가 망하자 '대대로 명문이라는 소리를 듣는 우리 가문이 일제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면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라 통탄했습니다. 이들은 백사 이항복의 10세 후손으로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던 이유승(李裕承)의 여섯 아들이었습니다.
이들 형제는 60명의 대가족 모두를 12대의 마차에 나누어 태우고, 1910년 겨울에 서울 명동을 떠나 눈 내리는 만주로 망명하였던 것입니다. 첫째는 이건영(李健榮·1853~1940), 둘째 이석영(李石榮·1855~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 이시영(李始榮·1869~1953), 여섯째 이호영(李頀榮·1875~1933)이었습니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은 넷째였던 이회영이었습니다.
우당 이회영, 전 생(生)을 바친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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