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의 상대사가 지었다고 합니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옵니다.
봉정사의 영산암은 지조암과 함께 봉정사의 부속암자로 응진전, 영화실, 송암당, 삼성각, 우화루·관심당 등 5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건물의 구체적인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봉정사영산암향로전창건기'와 봉정사영산전중수기'등의 사료로 볼 때 19세기 말로 추정됩니다.
건축적으로는 크게 주목할만한 부분은 없으나 우화루와 송암당 등에서 폐쇄적인 공간을 개방적으로 처리한 것이나 삼성각 앞의 조경수법도 경직될 수 있는 공간을 부드럽게 유도한 것 등은 매우 뛰어난 공간처리 수법으로 볼 만 합니다.
마당엔 비질 자국… 문틈새 염불소리… 모든걸 내려놓다
이른 새벽 서울을 떠나 고속도로에 올랐다. 동쪽을 향한 길. 안동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동쪽의 아늑한 고을을 뜻하는 ‘안동(安東)’이란 이름은 후삼국시대 말에 붙여졌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을 지금의 안동 일대에서 물리친 후 고창군(古昌郡)을 안동부(安東府)로 개칭하고 승격시켰다.
그 편안한 동쪽 마을로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수려한 산천과 함께 많은 문화유산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누각
고속도로를 나와 가장 먼저 천등산 봉정사를 찾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참나무 숲 언덕을 오른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창건된 고찰이다.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 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 날렸는데, 그 봉황이 내려앉은 곳에 절을 세웠다는 설화가 있다. 봉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극락전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여러 시대의 건축기법을 보여 주는 다양한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옛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본채 마당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봉정사를 찾는 즐거움은 암자인 영산암 덕분에 배가된다고 생각한다. 영산암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면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한때 유명세로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이제는 고즈넉한 편안함을 되찾은 듯싶다.
영산암은 암자치고는 본사에 가까이 자리 잡고 있다. 봉정사 금당이 있는 중심 영역을 우회해 높은 계단을 오르면 이내 영산암의 입구인 우화루(雨花樓)가 나타난다. 꽃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뜻의 2층 누각이다. 우화루 아래 출입구는 높이가 좀 낮은 편이다. 웬만한 키의 사람은 고개를 약간 숙여 지나야 한다. 이를 두고 ‘부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해석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 암자 마당에 새겨진 시간의 물결
우화루 입구를 지나면 영산암 안마당이 눈높이에 나타난다. 영산암은 역시나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다기보다는 아늑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ㅁ’자형 구조의 영산암 마당은 단층이 아니라 3개 층의 복합적 구조로 이뤄진 것이 특징이다. 반송과 배롱나무가 마당들의 경계가 된다. 높이 차에 따른 마당의 구획들과 그 경계에 서 있는 나무들은 더없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른 아침 스님은 비질을 하며 시간의 물결을 마당 바닥에 아로새겨 놓았다. 마당 위로 차마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낡은 암자의 빛바랜 단청, 그리고 벽에 그려진 호랑이며 토끼 등의 흐릿하지만 익살스러운 그림들. 이 모든 것이 자아내는 아늑함을 만끽했다. 우화루 누각 2층에선 짙푸른 녹음이, 마당 위에선 아침 하늘의 검푸른 빛깔과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걸터앉은 툇마루에는 여름날의 뜨거움을 예고하는 희미한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서서히 그늘이 작아졌다.
하루가 움직이고 있다. 고요하다. 시간이 영산암 마당에 소리 없는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등 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낮은 염불 소리마저 내게는 침묵처럼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그나저나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을까? 내가 영산암에 온 것과 같은 이유일까? 피식, 기분 좋은 웃음이 새 나왔다. 그 웃음은 편안한 고장의, 편안한 마당으로 보기 좋게 흩어져 사라졌다.
그 편안한 동쪽 마을로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수려한 산천과 함께 많은 문화유산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누각
고속도로를 나와 가장 먼저 천등산 봉정사를 찾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참나무 숲 언덕을 오른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창건된 고찰이다.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 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 날렸는데, 그 봉황이 내려앉은 곳에 절을 세웠다는 설화가 있다. 봉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극락전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여러 시대의 건축기법을 보여 주는 다양한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옛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본채 마당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봉정사를 찾는 즐거움은 암자인 영산암 덕분에 배가된다고 생각한다. 영산암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면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한때 유명세로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이제는 고즈넉한 편안함을 되찾은 듯싶다.
영산암은 암자치고는 본사에 가까이 자리 잡고 있다. 봉정사 금당이 있는 중심 영역을 우회해 높은 계단을 오르면 이내 영산암의 입구인 우화루(雨花樓)가 나타난다. 꽃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뜻의 2층 누각이다. 우화루 아래 출입구는 높이가 좀 낮은 편이다. 웬만한 키의 사람은 고개를 약간 숙여 지나야 한다. 이를 두고 ‘부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해석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 암자 마당에 새겨진 시간의 물결
우화루 입구를 지나면 영산암 안마당이 눈높이에 나타난다. 영산암은 역시나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다기보다는 아늑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ㅁ’자형 구조의 영산암 마당은 단층이 아니라 3개 층의 복합적 구조로 이뤄진 것이 특징이다. 반송과 배롱나무가 마당들의 경계가 된다. 높이 차에 따른 마당의 구획들과 그 경계에 서 있는 나무들은 더없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른 아침 스님은 비질을 하며 시간의 물결을 마당 바닥에 아로새겨 놓았다. 마당 위로 차마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낡은 암자의 빛바랜 단청, 그리고 벽에 그려진 호랑이며 토끼 등의 흐릿하지만 익살스러운 그림들. 이 모든 것이 자아내는 아늑함을 만끽했다. 우화루 누각 2층에선 짙푸른 녹음이, 마당 위에선 아침 하늘의 검푸른 빛깔과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걸터앉은 툇마루에는 여름날의 뜨거움을 예고하는 희미한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서서히 그늘이 작아졌다.
하루가 움직이고 있다. 고요하다. 시간이 영산암 마당에 소리 없는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등 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낮은 염불 소리마저 내게는 침묵처럼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그나저나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을까? 내가 영산암에 온 것과 같은 이유일까? 피식, 기분 좋은 웃음이 새 나왔다. 그 웃음은 편안한 고장의, 편안한 마당으로 보기 좋게 흩어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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